인터넷을 돌다가 공감되는 글이 있어서 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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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병권의 '촛불정국' 분석 - "추방된 자들의 귀환"
추방된 자들의 귀환 - 2008년의 촛불시위
고병권(연구공간 수유+너머)
1. 어두운 전조
"처음엔 몇 사람이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온통 까맣게 되었다."(카네티, 『대중과 권력』)
대중이란 그런 것이다. 2008년 4월만 하더라도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5-6월에 그토록 까맣게 되리라고. 모두가 이 사태를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한편으로 그것이 예정되어 있던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새 정부 출범 100일에 그런 일이 예정되어 있을 리 만무하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이 사태를 예상할 수 없었던 것은, 그것이 언제든 일어날 수 있었고,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벤야민의 표현처럼 “매초 매초가 언제라도 메시아가 들어올 수 있는 조그만 문”이기 때문이다(벤야민, 「역사철학테제」).
결국 문제는 전조이다. 언제 번개가 칠 것인지 확정할 수는 없었지만 우리 모두가 산등성이에 먹구름이 몰려드는 것을 보고 있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과거와 미래 사이를 떠도는 먹구름’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다. 조금씩 방전이 일어나고 있는 먹구름들, ‘번개를 낳을 구름들’이 최근 한국 사회에서 쌓이고 또 쌓였다. ‘고소영’, ‘강부자’, ‘S라인’ 등으로 희화화된 초대 내각과 청와대 비서진.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야기한 ‘영어몰입교육’, ‘우열반 편성’, ‘소위 0교시 문제’, 대통령이 직접 언급한 ‘비즈니스 프랜들리’와 각종 규제 완화, 법질서에 대한 강조. 공기업 민영화(전기, 가스, 수도, 의료보험 등), 국토 전체를 가르는 대운하, 그리고 마침내 미국산 쇠고기 협상 처리.
어두운 전조. 신정부의 새로운 조치들은 대중의 ‘불안’을 ‘더 크게’ 증폭시켰다. ‘더 크게’라는 말에 유의하자. 왜냐하면 ‘불안’은 이전 정부에서부터 이미 존재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불안’이 이명박 정부를 낳았다. 집권자들이 착각하는 것과 달리, 이명박 정부를 낳은 것은 그들의 ‘힘’이나 ‘능력’이 아니라, 바로 대중들의 ‘불안’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십여 년 동안 대중들은 극도의 삶의 불안에 시달리고 있었다. 불안은 삶의 안정된 구조가 해체된 사태, 아예 하나의 ‘구조’로 자리잡은 영속적 ‘재구조화(리스트럭처링, restructuring)’, 일상이 된 예외적 시간 등이 낳은 정서였다. 그것은 또한 공동체 ‘내부’에 있지만 ‘보호’받을 수 없을 때 생겨나는 감정, 우리 사회 안에 있지만 지구적 시장의 폭력이 곧바로 타격을 가한다는 사실에서 느끼는 감정이기도 하다. 우리에게 울타리가 있는 것인지, 우리에게 정부가 있는 것인지, 저 정부가 과연 우리의 정부인지 의심스러운 사태. 대중들은 거기서 어떤 ‘상실감’을 느낀다.
대중들이 느낀 상실감. 그것은 직접적으로는 소득의 상실, 고용의 상실을 의미한다. 하지만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거기에는 ‘삶의 안전보장 상실’이 있다. 현 집권자들은 지난 십년을 ‘잃어버린 십년’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고소영 강부자 내각이 보여주듯 상실의 의미는 그들과 대중들에게 전혀 다른 것을 의미한다. 새로운 집권자들이 지난 십년 간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그들은 재집권했다. 그러나 대중들은 어떤가. 그들은 여전히 ‘알 수도 없고’, ‘통제할 수도 없는’ 어떤 힘에 삶이 내맡겨져 있다는 불안에 시달린다. 대중들은 자기 삶을 좌우하는 모든 결정들에 어떤 개입도 할 수 없으며 그것이 도무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것이 불안을 야기한다.
이 먹구름들이 얼마나 농밀해졌던가. 징후는 곳곳에서 포착되었다. 아주 사소한 사건에도 전체가 요동칠 수 있다는 조짐들. 사실 아주 강력한 신호가 4월 6일에 포착되었다. ‘안단테’라는 아이디를 쓴 한 고등학생이 한 인터넷 사이트가 마련한 ‘국민청원’란에 ‘대통령’ 탄핵 청원을 올렸다. 사실 온갖 ‘안티’ 카페들이 만들어지고 온갖 청원들이 난무하는 세태를 염두에 둔다면 이것은 그야말로 아무 것도 아닌 ‘장난’이었을지 모른다. 서명 목표를 천만 명으로 잡은 것도 그 탄핵청원의 어떤 비현실성을 보여준다. 그러나 탄핵 청원에 동의한 인터넷 서명자는 가볍게 백만 명을 넘어버렸다. 서명자 수가 매일 십만 명 단위로 증가하기 시작하면서 사태가 간단치 않다는 것을 누구나 느꼈다. 집권자들을 제외하고는.
먹구름이 가득하다면 아주 사소한 사건도 방전의 계기가 될 수 있다. 그리고 작은 방전은 무시무시한 번개로 발전한다. 그 작은 방전을 일으킨 것이 ‘쇠고기 협상 타결’이었다. 그 타결 소식을 듣고 부시를 만나러 가던 이명박은 환호성을 질렀다는 어떤 전언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방전을 일으켰다. 이런 전조가 마련되지 않았다면 ‘쇠고기 협상’에 대해 “이전 정부가 벌여놓은 일을 설거지 했을 뿐”이라는 말이나, “광우병 위험이 과장되어 알려졌다”는 정부의 말이 이 정도의 반발을 불러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분명 지난 정부에서도 ‘쇠고기 협상’은 ‘스크린쿼터 축소’ ‘의약가 조정’ 문제’, ‘자동차배기가스 규제 기준’ 문제 등과 함께 ‘한미자유무역협정’ 추진을 위한 소위 ‘4대 선결과제’ 중 하나이긴 했다. 현 정부의 말마따나 광우병 위험도 다소간 과장되었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과연 문제는 어디에 있었는가. 집권 세력은 그들 자신이 모아놓은 먹구름, 그 어두운 전조의 형성을 보지 못했다. 아니 볼 수 없었다. 바로 그랬기 때문에 4월 30일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에서 ‘미국산 쇠고기의 광우병 위험’ 문제를 거론했을 때의 파장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내린 결론은 ‘방송 프로그램의 농간에 놀아난 무지한 대중들’이었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소위 진보 진영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았다. 정태인은 경향신문이 주최한 시국토론에서 이 문제에 대해 자신이 느낀 놀라움을 이렇게 전했다.
“지난 5월 2일 청계광장에 나갔을 때 충격을 받았다. 내가 한·미 자유무역협정에 대해 500회 정도 기고·강연을 하면서 그때마다 광우병 얘기를 했는데도 전혀 씨알이 먹히지 않았는데 단숨에 여중생에 의해 돌파된 게 놀라웠다. ... 그 다음 발전 과정은 더 놀라운데, 대운하, 민영화, KBS 지키기까지 의제가 확장됐다.”(경향신문, 2008/6/18)
정말 왜 그랬을까. 광우병 위험을 그가 그토록 떠들 때는 씨알도 먹히지 않았는데, 지금 이 사태는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인가. 사실 이 사태는 우리에게 낯선 게 아니다. 2002년 미군 장갑차가 일으킨 사고로 ‘미선’, ‘효순’ 두 중학생이 죽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건은 월드컵 기간 중에 일어났고, 그 사건을 계기로 정부와 미국을 규탄하던 시위대는 응원 군중들에 의해 핍박을 받았다. 월드컵이 그 사건을 삼켜버렸다. 그런데 월드컵이 끝나고 그 사건은 다시 조명을 받았고 대규모 촛불 시위가 일어났다. 그때 대책위 관계자가 정태인과 비슷한 말을 했다. “우리가 그토록 싸울 때는 돌아보지도 않던 사람들이...”
<왼쪽 2008년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 오른쪽 2002년 미선, 효순 추모 촛불집회> 대중이란, 메시아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을 기다리는 사람은 그것을 만나지 못한다. 그것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것은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매초 매초가 그것에 열려있다.
2. 광장으로 난입한 대중, 그들은 누구인가한마디로 그들은 누구인가. 처음에는 몇몇이었다가 갑자기 새까맣게 몰려든 이들. 그들 낱낱을 보면 그들이 누구인지, 왜 여기에 왔는지를 알 수 없다. 그들은 한편으로 학생이고, 주부이고, 노동자이며, 실직자고, 노인이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닌 자들이다. 그들은 자기 이름과 직업을 밝힐 때조차 익명의 대중으로 거기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은 누구인가’에 대한 물음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 가능한 물음일 뿐만 아니라 꼭 필요한 물음이기도 하다. 그것은 대중이라는 흐름에서 특이점에 대한 물음일 때 의미를 갖는다. 특이점과 보통점을 구별하는 것. 이것이 관건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참가자 중 다수는 누구였는가?’라는 물음은 그다지 좋은 물음이 아니다. 단순히 수가 많다는 것 때문에 대중이 그 집합의 특성을 갖는 것이 아니다.
이번 시위에서 문제가 되었던 집단들에 대해 생각해보자. 우선 탄핵 발의를 했던 ‘안단테’, 그리고 초기 시위를 특징지었던 (여)중고생들, 그리고 일명 ‘유모차 부대’의 주부들. 형식적 의미에서든, 실질적 의미에서든 이들은 기존의 정치적 시민권을 갖고 있지 않았던 사람들이다.(하승우는 경향신문 시국토론에서 “여성과 청소년이 주체로 나서 ‘시민-되기’를 체험했다”고 지적했는데 의미있는 지적이다.) 문제는 이들이 쇠고기 문제에 대한 정치적 결정에 어떤 영향력도 행사할 수 없는 이들이지만, 또한 그 결정에 가장 큰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사실이다. 청소년들이나 유모차부대, 그들은 광우병 쇠고기 위험에 노출되어 있거나 그것에 예민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었다.
<1000일이 넘도록 투쟁하고 있는 기륭전자 비정규직 노동조합 조합원들> 이것은 또한 익숙한 풍경이다. 작년 가을 ‘비정규직 보호법’ 개정 문제를 논의하는 노사정위원회의 파행 사건의 본질이 그것이었다. 회의장에 난입해서 회의를 파행시켰던 기륭전자, 코스콤, 이랜드 노동자들의 외침은 하나였다. 왜 비정규직의 보호 문제를 다루는 자리에 정작 당사자인 비정규직 노동자는 참여하지 못하는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회의장에 난입했던 사건, 그것은 결정의 자리에 참석할 수 있는 ‘자격을 갖지 못한 자들’의 ‘권리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사실 이런 문제들은 사실 ‘소수자’ 일반의 것이기도 하다. 소수성은 장 자체의 성격에 의해 규정된다. 즉 소수적 투쟁은 장 안에서 일어나는 투쟁이 아니라, 그들을 주변화하거나 배제하는 장 자체에 대해서 벌이는 투쟁이다. 그것은 그 장을 규정하는 척도의 배제적 성격과 관련이 된다. 그래서 소수자들의 정치적 투쟁은 척도나 논리 자체의 정치성을 문제 삼는 것으로 나타난다. 근거나 대의조직을 갖추지 못한 채, 근거나 대의기구 자체를 문제 삼을 때, 이들은 투쟁은 근거가 없고 기구들의 매개를 거치지 않는 직접행동, 즉 난입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 그것은 ‘매개 없는 대규모 진입’의 형태를 띤다. 이와 관련해서 하승창은 <한겨레>의 좌담에서 이런 말을 했다.
“시민단체가 매개되지 않은 운동이 전개되고 있는데, 사실상 기존의 시민단체의 역할과 지위가 끝난 것으로 볼 수도 있다.”(한겨레, 2008/6/12)
문제는 지난 십여 년간 한국 사회의 변화, 특히 ‘양극화’가 의미하는 바가 ‘대중의 소수화’에 있다는 사실이다. 한국 데모크라시는 최근 들어 부쩍 ‘데모스를 추방하는 데모크라시’ 형태를 띠고 있다. 한미자유무역협정 추진 과정에서도 극명하게 나타났지만, 대중들은 그 자신의 운명을 결정할 사안에서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정부의 테크노크라트와 의회의 의원들, 주류 언론들, 그들이 어떤 컨센서스를 형성하고, 그것을 통해 배제의 정치를 작동시킨다. 즉 ‘합의로부터의 배제’, ‘합의를 통한 배제’가 작동하는 셈이다. 신자유주의 하에서 다수 대중들은 추방된 자, 배제된 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범위의 차이가 있고 정도의 차이가 있지만 다수의 대중들은 그런 점에서 소수성을 품고 있었다. 가장 강렬한 반응을 보인 소수자들의 행진이 시작되자마자 많은 이들이 품고 있던 소수성이 들끓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대규모 대중들의 매개 없는 난입! 그것이 이 사태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3. 미디어: ‘im-media-tion’과 ‘onoff-line’ ‘매개가 없다’, ‘매개되지 않는다’는 말이 가장 강력하게 부각된 것은 ‘미디어’ 영역이었다. ‘미디어’는 단순한 ‘미디에이션’, 즉 ‘매개작용’을 하는 데 머무르지 않았다. 임시로 하나의 조어를 하자면 미디어는 ‘미디에이션’에서 ‘이미디에이션(im-mediation)’으로 나아가고 있다. 즉 매개에서 어떤 직접 행동으로 변화하고 있다. 이번 시위에서 드러난 몇몇 행동 속에서 미디어는 ‘미디어 액션’이었고, 그런 점에서 ‘행동-미디어(action-media)’라고 불러도 좋을 것 같다.
민경배는 이번 시위에서 디지털 매체가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분석하면서
시위 참가자 유형을 참가자, 기록자, 분석자, 전파자 등으로 나누었는데, 그 분류를 따라가면서 이번 시위에서 미디어의 문제를 생각해보고자 한다
(민경배, “X마스 트리처럼 점멸하는 민주주의”, 시사인, 2008/6/14).
1) 참가자. 거리에서 행진을 직접 벌이는 자. 그러나 그는 단순히 걷고 있는 게 아니다. 그는 현장에서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로 다른 참가자와 소통하고, 집회에 참가하고 있지 않는 친구나 가족들에게 상황을 전하고 참가를 독려한다. (이 점에서 그가 전송하는 문자메시지나 영상메시지는 상황의 전달이 아니라 촉발이라고 할 수 있다.)
2) 기록자. 시위의 주변부에 포진해서 디지털 카메라와 캠코더, 노트북을 활용해서 동영상을 실시간으로 인터넷에 올리는 이들. 시위의 생중계. 경찰의 채증에 대한 역채증(여기서 어떤 시선이 역전이 일어난다. 특히 경찰이 세종로에 설치한 CCTV 영상은 시위 상황을 생중계하는 중요한 화면이기도 했다). 특히 시위를 생중계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뉴스 화면 등을 통해 나중에 녹화 영상을 보는 것과는 아주 다르다. 시위의 생중계는 시위를 특정한 물리적 장소를 넘어 네트워크화하는 하나의 방법이다. 생중계를 보던 이들이 다시 시위 현장으로 뛰어드는 일이, 이 생중계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고 하겠다.
그 외 3) 분석자. 기록자는 인터넷에 올라온 사진과 동영상을 판독해서 경찰 폭력을 고발하고, 집회에 참가할 때 필요한 준비물이나 숙지해야 할 사항들을 정리해서 올리는 사람들이다. 또 위성사진 등을 통해 시위대에게, 시위대와 경찰의 이동경로를 끊임없이 알려주는 사람들이다.
4) 전파자. 블로그와 게시판을 통해 집회 참가 후기도 올리고 정부와 경찰의 태도를 비판하는 글을 올리거나 퍼 나르는 사람들. 온라인 상에서 여론을 조성하는 소위 ‘빅마우스’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이 네 유형에 속하는 사람들이 엄밀하게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참가자가 기록자가 되고, 다시 집에 와서는 분석자나 전파자 임무를 수행하기도 한다.”
미디어와 관련해서 또 하나의 인상적인 사건은 ‘켜짐’과 ‘꺼짐’, ‘사이버 스페이스’와 ‘리얼 스페이스’의 연결이었다. 우리는 그것을 하나의 불가능한 조어, ‘onoff-line’라는 말로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6월 10일, 우리에게 화제가 되었던 하나의 사건이 있었다. 집회의 사회를 본 이가 온라인 상의 대중들에게, ‘청와대 홈페이지를 다운시키라’는 하나의 지침을 전달했다. 이것은 시위가 인터넷으로 생중계되고 있고 많은 이들이 ‘온 라인’ 되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만 가능한 것이다. 1-2분 사이에 청와대 홈페이지는 다운되었다. 사이버 스페이스에서 일어난 그 사실은 곧바로 리얼 스페이스로 전달되었다. 종 사이의 경계를 뛰어넘는 바이러스처럼, 서로 소통 불가능한 이질적 장을 뛰어넘은 ‘미디어’. 나는 미디어의 그런 작용이 또한 ‘이미디에이션(im-media-tion)’의 특징이라 부르고자 한다.
‘미디어’는 그 자체로 직접적으로 던져진, 그리고 자생적으로 움직이는 마디이다. 그것은 일종의 ‘중간’이다. 그러나 두 개체가 존재하고 그 사이에 미디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미디어는 차라리 하나의 리좀처럼 자라나는 줄기 토막이다. 그것은 하나의 장 안에서, 지배적 언어를 통해 무언가를 표상하거나 매개하지 않는다. 그것은 여러 장을 관통하는 방식으로 그 장들을 소통시킨다. 소통하는 것과 소통되는 것의 구별이 사라진 것. 말하는 자와 전달하는 자의 구별이 사라진 것. 직접화법과 간접화법의 구별이 사라진 것. 그것이 ‘이미디에이션’의 특징이다.
4. 혁명의 혁명 -바리케이트는 누가 쳤는가매개의 실종은 대표의 실종과 통한다. 저녁에 시작된 시위가 이른 아침에야 끝나는 이유 중의 하나는 경찰이 느끼는 어떤 난감함과도 관련이 있다. 시위대에는 협상을 해 줄만한 소위 ‘대표자’들이 없다. ‘광우병 국민 대책위원회’라는 것이 구성되어 있기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고 있듯이 그들이 어떤 통제력을 행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오히려 초기에 있었던 소위 ‘다함께 논쟁’은 운동 조직의 ‘의식적 지도’에 대한 대중들의 반발, 혹은 어떤 통제 불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물론 순간적인 지도자나 전위는 있었다. 사소하게는 대중들의 행진 중에서 몇몇 사람들이 그럴듯한 의견을 표할 때 그 대중의 흐름은 그들의 의견에 맞추어 경로를 택했다. 6월 초 어느 날 저녁, 내 기억에 따르면, 앞에서 대중들의 행진을 이끌던 이들이 종로와 세종로의 교차지점에 설치한 경찰의 벽에 막히자, 종로에 앉아 집회를 진행하려고 했을 때, 뒤쪽 대중들은 뒤로 빠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종로구청 뒷길을 통해 청와대쪽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고 상당히 많은 이들이 그들을 따랐다. 그리고 경복궁 근처에서 경찰 벽과 부딪히자 일부는 대학로로 진출하려고 했다. 최근 경찰청장이 어떤 자리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경찰이 이런 시위 전개 때문에 얼마나 곤혹스러워하는지를 알 수 있다. (cf. 꼭 시위행진에만 이런 양상이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최초의 탄핵발의를 했던 고등학생, 최초로 유모차를 끌고 나온 주부, 아고라에서 중요한 의견을 내고 있는 이들, 모두가 대중들에게 하나의 출구를 제시하는 ‘일시적’ 지도자 역할을 하고 있다.)
내 생각에, 바리케이트의 존재가 이번 시위처럼 무시되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오히려 바리케이트를 치고 농성을 벌인 것은 경찰과 청와대였다(소위 명박산성). 누가 바리케이트를 쳤는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누가 공격적이고 누가 수세적인가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바리케이트가 프랑스 혁명 이후, 오랫동안, 너무나 오랫동안 봉기와 혁명의 기본 모델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_ 이응로作 『군상』"그것은 갑자기 들이닥친다. 그것은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는다. 하지만 매초 매초가 그것에 열려있다."언젠가 엥겔스는 ‘과거 혁명이 새로운 혁명의 발목을 잡고 있다’고 주장하며, 소위 혁명을 혁명하는 문제를 제기한 적이 있다(고병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