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74년 중금속 오염실태 조사 특종으로 한국기자상(7회) 수상
기사를 쓰기 위해 여러 대학 도서관을 순례하며 논문 자료를 정독하고,
정기적으로 갱신되는 논문 리스트를 확인하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
2. 1974년 기자협회 국제신보 분회의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
유신정권의 장기화와 언론의 반정부 투쟁(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등)에 동참해 반정부, 반박정희 노선에 참여, 언론자유 투쟁
3. 1976년 포항 유전 경제성 없다는 기사로 해고 당함.
당시는 전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인해 전국민이 국내 해저석유탐사에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고,
'한국도 곧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건만, 그는 기사 적성을 위해 석유 시추에 대해 공부한 결과,
이에 의문을 품어 광구 시추를 맡은 미국 쉘사(社)의 사무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의 열성을 보이며 정보를 모아,
포항 앞바다 유전이 경제성이 없는 유전이었음을 밝혀내 이를 보도함. 포항 석유 시추는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면서
박 대통령이 실망할까봐 보고를 하지 않았었고, 언론에 압력을 가해 석유관련 보도 금지를 해 놓았었던 상태였으나,
그는 철저한 자료 분석에 근거해 포항유전의 비경제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고, 200부를 찍어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석유관련 정부부처, 각 언론사 주한 외국 특파원 앞으로 발송. 이후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기자직에서 해고를 당함.
4. 1980년 광주 5.18무단취재로 해고
중정 부장이 바뀌자, 복직을 할 수 있었고, 이후 80년에 신군부의 만행을 취재하겠다며 광주로 단독 잠입취재를 갔고,
회사에는 아프지도 않은데 병가를 제출. 이후 광주에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해 신문사에 송출. 때문에 국제신문사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어 또다시 해고를 당했고, 이후 같은 해 8월 신군부는 전국 언론사에 그를 해임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며 확인사살.
5. 1982년 김근하 어린이 유괴사건의 검찰 측 고문 조작 사건 기사화
1967년 부산에서 김근하 소년이 유괴 살해 사건 발생하였는데, 검찰은 김기출씨를 범인으로 지목...
그러나, 결국 무죄로 풀려나오게 되었으나, 김기출씨는 고문 휴유증으로 곧 사망. 그는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15년째인 1982년 "공명심에 가득 찬 검사와 경찰이 어떻게 고문을 해
사건을 조작했으며, 무전과의 무고한 청년의 인생을 망쳤는지에 대한 상세한 고찰로 기사를 작성.
그의 노력으로 이 사건은 검찰의 무리한 고문수사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
그가 작성한 기사로 '신화 1900'이라는 제목의 연극 공연되었고, 이 연극이 그 해 상을 휩쓸었음.
당시 MBC 드라마 [수사반장] 작가 윤대성씨도 이 기사를 토대로 드라마용 시나리오를 썼음.
6. 각종 3공, 5공 비화 취재
10·26사태 때 피고인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를 취재해 10·26사태를 재구성,
부마항쟁의 원인과 경과를 상세히 추적한 보도를 내놓음으로써
부마항쟁과 김재규 그리고 10·26사태 간의 관계를 설명 및 탐사보도.
이후락 전 정보부장의 인터뷰.
7. 박정희와 동거한 여인 밝혀냄
3공 비화 추적과 관련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기 전,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을 나온 원산 출신의 이모 여인과 동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여인은 박정희와 헤어진 후 푸줏간을 하던 사람과 결혼해 살다가 작고했다.
이 여인과 박정희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와 결혼하기
전 고향(경북 선산)에서 부모가 맺어준 여인과 결혼해 딸을 낳고 이혼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또 다른 여인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8. 한국내 CIA 조직 심층취재로 안기부에 끌려감
1986년 그는 월간조선 2월호에 '한국 내 미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리서치 유닛(Research Unit)이라는 이름의 미 CIA 한국거점이 어떻게 구성돼 있고
어떤 활동을 하며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이들의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밝혀버린 것.
주한 미대사관이 발칵 뒤집혔다. 이러한 정보는 CIA와 늘 접촉하는 안기부 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것이다.
화가 난 워커 주한 미대사가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남산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국 대공수사단의 지하 조사실로 들어가 취재 경위를 조사받았다.
9. 이수근 간첩 조작사건 취재
1989년 3월호에 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제하의 기사.
이수근은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하던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귀순했다.
그가 남쪽으로 넘어올 때 판문점에 있던 북한군은 그의 월남을 막기 위해 총격을 가했다.
귀순용사 이수근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여교수와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나갔다 체포된 후 위장간첩으로 몰려 1969년 7월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이 기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
그는 남쪽에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홍콩과 베트남을 거쳐 제3국으로 나가려고 했다가 검거된 것이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준 대로 연설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이러한 그가 검거되자 김형욱 중정부장은 조잡한 암호문 등을 만들어 그를 위장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그의 이름은 조갑제입니다
사람이 변하는건 순식간...
출처: http://typoon0726.tistory.com/1154
기사를 쓰기 위해 여러 대학 도서관을 순례하며 논문 자료를 정독하고,
정기적으로 갱신되는 논문 리스트를 확인하고, 공부를 게을리 하지 않았음.
2. 1974년 기자협회 국제신보 분회의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
언론자유실천대책위 간사로 활동
유신정권의 장기화와 언론의 반정부 투쟁(동아일보 '백지광고' 사건 등)에 동참해 반정부, 반박정희 노선에 참여, 언론자유 투쟁
3. 1976년 포항 유전 경제성 없다는 기사로 해고 당함.
당시는 전 세계적인 오일쇼크로 인해 전국민이 국내 해저석유탐사에 큰 기대를 하고 있던 시절이었고,
'한국도 곧 산유국이 될 것'이라는 희망에 들떠 있었건만, 그는 기사 적성을 위해 석유 시추에 대해 공부한 결과,
이에 의문을 품어 광구 시추를 맡은 미국 쉘사(社)의 사무실 쓰레기통을 뒤지는 등의 열성을 보이며 정보를 모아,
포항 앞바다 유전이 경제성이 없는 유전이었음을 밝혀내 이를 보도함. 포항 석유 시추는 중앙정보부에서 관리하면서
박 대통령이 실망할까봐 보고를 하지 않았었고, 언론에 압력을 가해 석유관련 보도 금지를 해 놓았었던 상태였으나,
그는 철저한 자료 분석에 근거해 포항유전의 비경제성에 대한 논문을 작성하고, 200부를 찍어 청와대와 중앙정보부,
석유관련 정부부처, 각 언론사 주한 외국 특파원 앞으로 발송. 이후 중앙정보부의 압력으로 기자직에서 해고를 당함.
4. 1980년 광주 5.18무단취재로 해고
중정 부장이 바뀌자, 복직을 할 수 있었고, 이후 80년에 신군부의 만행을 취재하겠다며 광주로 단독 잠입취재를 갔고,
회사에는 아프지도 않은데 병가를 제출. 이후 광주에서 취재를 하고, 기사를 작성해 신문사에 송출. 때문에 국제신문사의
처지가 난처하게 되어 또다시 해고를 당했고, 이후 같은 해 8월 신군부는 전국 언론사에 그를 해임시키라는 지시를 내리며 확인사살.
5. 1982년 김근하 어린이 유괴사건의 검찰 측 고문 조작 사건 기사화
1967년 부산에서 김근하 소년이 유괴 살해 사건 발생하였는데, 검찰은 김기출씨를 범인으로 지목...
그러나, 결국 무죄로 풀려나오게 되었으나, 김기출씨는 고문 휴유증으로 곧 사망. 그는
공소시효가 만료되는 15년째인 1982년 "공명심에 가득 찬 검사와 경찰이 어떻게 고문을 해
사건을 조작했으며, 무전과의 무고한 청년의 인생을 망쳤는지에 대한 상세한 고찰로 기사를 작성.
그의 노력으로 이 사건은 검찰의 무리한 고문수사의 사례로 자주 거론되고 있으며...
그가 작성한 기사로 '신화 1900'이라는 제목의 연극 공연되었고, 이 연극이 그 해 상을 휩쓸었음.
당시 MBC 드라마 [수사반장] 작가 윤대성씨도 이 기사를 토대로 드라마용 시나리오를 썼음.
6. 각종 3공, 5공 비화 취재
10·26사태 때 피고인 변호를 맡았던 변호사를 취재해 10·26사태를 재구성,
부마항쟁의 원인과 경과를 상세히 추적한 보도를 내놓음으로써
부마항쟁과 김재규 그리고 10·26사태 간의 관계를 설명 및 탐사보도.
이후락 전 정보부장의 인터뷰.
7. 박정희와 동거한 여인 밝혀냄
3공 비화 추적과 관련해 그는 박정희 대통령이 육영수 여사와 결혼하기 전,
이화여전(이화여대 전신)을 나온 원산 출신의 이모 여인과 동거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 여인은 박정희와 헤어진 후 푸줏간을 하던 사람과 결혼해 살다가 작고했다.
이 여인과 박정희 사이엔 아이가 없었다). 박 전 대통령이 육 여사와 결혼하기
전 고향(경북 선산)에서 부모가 맺어준 여인과 결혼해 딸을 낳고 이혼했다는
것은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 사이 또 다른 여인이 있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8. 한국내 CIA 조직 심층취재로 안기부에 끌려감
1986년 그는 월간조선 2월호에 '한국 내 미 CIA의 내막'이라는 기사를 게재했다.
리서치 유닛(Research Unit)이라는 이름의 미 CIA 한국거점이 어떻게 구성돼 있고
어떤 활동을 하며 한국에 어떤 영향을 끼치고 있는가를 분석하고, 이들의 사무실 전화번호까지 밝혀버린 것.
주한 미대사관이 발칵 뒤집혔다. 이러한 정보는 CIA와 늘 접촉하는 안기부 관계자가 아니면 알기 힘든 것이다.
화가 난 워커 주한 미대사가 장세동(張世東) 당시 안기부장에게 항의 전화를 걸었다.
그는 임의동행 형식으로 남산에 있던 안기부 대공수사국 대공수사단의 지하 조사실로 들어가 취재 경위를 조사받았다.
9. 이수근 간첩 조작사건 취재
1989년 3월호에 쓴 '이수근은 간첩이 아니었다' 제하의 기사.
이수근은 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을 하던 1967년 3월22일 판문점에서 귀순했다.
그가 남쪽으로 넘어올 때 판문점에 있던 북한군은 그의 월남을 막기 위해 총격을 가했다.
귀순용사 이수근은 한국에서 대대적인 환영을 받고 여교수와 결혼까지 했다.
그러나 베트남으로 나갔다 체포된 후 위장간첩으로 몰려 1969년 7월2일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는 이 기사에서 이렇게 주장했다. '이수근은 위장간첩이 아니었다.
그는 남쪽에서도 자유를 찾지 못했기 때문에 홍콩과 베트남을 거쳐 제3국으로 나가려고 했다가 검거된 것이다. 그는 중앙정보부가 만들어준 대로 연설하는 것을 힘들어했다. 이러한 그가 검거되자 김형욱 중정부장은 조잡한 암호문 등을 만들어 그를 위장간첩으로 몰아 처형했다.'
그의 이름은 조갑제입니다
사람이 변하는건 순식간...
출처: http://typoon0726.tistory.com/1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