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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산체스 (발렌시아 / 스페인 대표)
interview by 페르난도 호세 알바레스 / MARCA
from World Soccer Digest 2006, 10.19 No. 229

운명, 運命


베티스를 떠나려고 결심했던 날부터 이미 마음은 정해져 있었다.
이적을 둘러싸고 너저분한 일들이 계속되어,
한 때는 축구를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던 시기도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지는 꺾이지 않았다.
호아킨 산체스에게 있어서,
발렌시아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은「운명」이었던 것이다.


8월말의 2주간은 정말로 최악이었다.

축구를 그만두려고까지, 한 때는 진심으로 생각했을 정도로.



월드 사커 다이제스트 (이하 WSD) 발렌시아의 선수가 된 지 한 달이 되어가고 있는데, 지금은 어떤 기분인가요?

호아킨 산체스 (이하 호아킨) 최고의 클럽에 올 수 있어서 최고로 행복해요. 이 곳은 클럽의 스케일도 커다랗지만 노리고 있는 목표도 높고, 무엇보다도 굉장한 선수들이 잔뜩 모여있죠. 하지만 팀의 모두들은 정말로 친절해요. 처음으로 팀에 합류했던 날에도 마치 계속 옛날부터 이 곳에서 플레이를 해왔던 것 같은, 그런 착각까지 할 정도였으니까요.  

WSD 서포터들의 환영도 열렬했었지요?

호아킨 아아. 이적 첫 날에는, 메스타야(발렌시아의 홈구장)에 9,000명이나 되는 팬들이 저를 맞이하려고 나와주었어요. 이번 여름, 베티스를 떠나야겠다고 결심했던 때부터, 저는 줄곧 발렌시아에 대한 것만을 생각하고 있었죠. 이 곳에서 플레이를 하는 것은 운명이라고까지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 열렬한 환영을 받았을 때, 그 예감이 틀리지 않았다고 확신했어요. 그건 정말로 감동적이었어요. 제 부인도 솔레르 회장의 사모님과 함께 울고 있었는데, 솔직히 따라서 울게 되어 버릴 것 같았으니까요. 그 날에 대한 것은 평생 잊어버리지 못 할 거예요. 

WSD 발렌시아에 대한 인상은요? 당신이 오랫동안 지내왔던 세비야와는 꽤 다르지 않나요?

호아킨 그렇게 차이를 느끼진 않아요. 크기도 거의 비슷한데다가, 기후도 좋고, 게다가 여기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세비야 사람들이랑 막상막하일 정도로 인생을 즐기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아요 (웃음). 물론 세비야는 최고의 도시이지만, 발렌시아도 마음에 들어요.

WSD 그건 그렇고, 이번의 이적은 매우 복잡하고 어려웠네요.

호아킨 8 월 중순부터의 2주간은 정말로 최악이었고, 더이상 아무 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번 일에서는 저뿐만이 아니라, 가족도 모두 괴롭힘을 당했죠. 한 때는 진심으로 축구를 그만두려고까지 생각했어요. 베티스와의 계약을 해지해버리고, 모든 것을 끝내버리자라구요. 

WSD 마누엘 루이스 데 로페라(전 베티스 회장으로, 현재는 클럽의 최대주주)는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당신의 이적을 인정하려고 하지 않았지요…….

호아킨 그는 저에 대한 것을 마치 판매하는 물건처럼 취급했어요. 확실히 축구선수라고 하는 것은 클럽으로부터 급료를 받고 있고, 선수의 매매에 의해서 경영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건 이해하고 있어요. 하지만 그 전에 우리들은 인간이예요. 로페라에 대해선 존경하는 마음이 사라져버렸죠. 그 태도에는, 확실하게 말해서 실망했어요.

WSD 8월말에는, 알바세테(2부)에 강제로 이적당하게 될 뻔 하기도 했었죠?

호아킨 아아. 로페라는 계약서의 내용을 방패삼아서,「어떻게든 나가겠다고 말한다면, 내가 고른 클럽으로 가야한다. 거부한다면 벌금이다」라 고……. 그래서 실제로 알바세테까지 갔었어요. 결국, 그쪽에서 정식 오퍼도 없이 이야기가 흘러가서 그 뒤에 발렌시아로의 이적이 이루어진거죠. 어쨌든 그 무렵엔 스스로의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어요. 축구를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거의 그 시기였죠.

WSD 리옹으로부터도 오퍼가 있었지요? 꽤 좋은 조건이었다고 들었는데 왜 그걸 거절하고 발렌시아를 선택했나요?

호아킨 중요한 것은 돈이 아니예요. 발렌시아에는 저를 선수로서 성장시켜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예요. 이 곳이라면 매 시즌마다 리가에서 우승을 놓고 다툴 수 있고, 챔피언스 리그에도 나갈 수 있죠. 그러한 경험들이 저에게 있어서 분명히 플러스 요인이 될거예요. 지금까지는 그다지 타이틀과 인연이 없었으니까, 발렌시아에서는 할 수 있는 만큼 많은 타이틀을 얻어내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WSD 리옹에서도 그 바램은 이룰 수 있는 것 아닌가요? 그들은 지금 프랑스 리그에서 무적의 존재라구요.

호아킨 그렇지요. 단지 역시, 리가에서 우승하고 싶다고 하는 생각이 강했어요.



클럽 사상 최고의 이적료도 부담은 되지 않는다.

큰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나고 있다.

WSD 예전에,「베티스에 생애를 바친다」라는 코멘트를 했던 적도 있었죠?

호아킨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시기가 있었던 것은 진짜예요. 베티스의 분위기는 좋았고, 첼시나 마드리드로부터의 고액 오퍼를 거절했던 적도 있었을 정도니까요. 단지 지난 시즌 도중에 찬찬히 생각해봤어요.「나도 이제 25살이 된다. 축구 선수로서 새로운 성장을 생각해야 할 시기에 다다른 게 아닐까」라 구요. 베티스에서는 코파 델 레이를 얻었고, 챔피언스 리그에도 출장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이 곳에서 해야 할 일은 더 이상 없다고 판단했던거죠. 단지 유스팀 시절부터 길러준 베티스에게 커다란 은혜를 입고 있고, 지금도 제가 "베티코(베티스의 팬)" 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어요.

WSD 발렌시아의 클럽 사상 최고액(2,500만 유로)으로 이적했다는 사실은 당신에게 부담이 되는 건 아닌가요?

호아킨 정반대네요. 큰 기대에 부응해야겠다는 의욕이 솟아나고 있어요. 저를 높게 평가해주고, 커다란 금액을 지불해 준 솔레르 회장이나 메스타야에서 저의 이름을 연호하며 맞아주었던 9,000명의 서포터를 위해서도요.

WSD 스포츠 디렉터인 카르보니는 베티스와의 교섭중에 줄곧 당신 곁에 있었던 것 같은데요?

호아킨 응. 카르보니에 대한 것은 대전 상대로서 잘 알고 있었지만, 정장 차림이 된 그는 신뢰할 수 있을만한 매우 훌륭한 인물이었어요.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던 저의 정신적인 버팀목이 되어주었죠.「반드시 너를 데려온다」라고 말해줬을 때에는 정말로 기뻤어요.

WSD 키케 플로레스 감독의 인상은요?

호아킨 키케는 말이죠, 아직 베티스에서 플레이하던 때부터 미디어를 통해서 저에 대해 종종 칭찬해주고 있었어요. 축구 선수에게 있어서 다른 클럽의 감독으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는 것 만큼 기쁜 일은 없으니까요. 아직 젊은 감독이지만, 항상 냉정하고 확고한 신념도 가지고 있어요. 틀림없는 일류 지도자예요. 

WSD 그로부터는 어떤 어드바이스를 받았나요?

호아킨「침착하게, 서두르지 않고 하면 된다」라구요. 갓 이적해 온 선수는 빨리 결과를 내야겠다고 초조해하기 쉽게 되는데, 그 한 마디로 많이 편안해졌어요. 실제의 플레이에 대해서도 지시가 적절해서 알기 쉬워요. 음, 꽤 세세한 부분까지 신경을 쓰는 감독이지만요.

WSD 발렌시아는 전통적으로 윙을 활용하는 와이드한 축구를 기본으로 하고 있죠. 키케 플로레스 감독도 그 흐름을 이어가고 있는데 왼쪽의 비센테에, 오른쪽의 호아킨이라고 하는 스페인 굴지의 양 날개를 단 이번 시즌은 이상적인 축구를 선보일 수 있겠죠?

호아킨 응. 비센테도 부상으로부터 완전하게 회복해서 전성기의 퍼포먼스에 가까워져가고 있으니까요. 우리들의 임무는 비야와 모리엔테스라고 하는 "페널티 에어리어의 스페셜리스트" 에게 가능한 좋은 공을 공급해주는 것이예요. 아직 호흡을 끌어올려야 할 필요는 있지만 개막한 지 얼마 안 된 이 단계로서는 꽤 잘해나가고 있는 것 아닌가해요.

WSD 새로 입단한 모리엔테스도 이렇게 얘기했어요.「비센테의 복귀와 호아킨의 합류는 무엇보다도 기쁜 뉴스다」라구요.

호아킨 정말, 좋은 녀석이예요(웃음). 농담은 제껴두고서도, 그만큼 한결같이 골을 기록하는 스트라이커도 그렇게 많지 않죠. 제 어시스트로 골을 많이 넣어줬으면 좋겠어요.

WSD 호아킨, 모리엔테스, 델 오르노라고 하는, 이번 여름의 보강은 거의 만점인 것 아닌가요? 타이틀 획득은 충분히 가능하죠?

호아킨「클 럽 사상 최강」이라는 목소리도 있을 정도고, 리가 제패도 꿈이 아니예요. 확실히 바르샤와 마드리드의 힘에 머리 하나 정도 빠질지도 모르지만, 이 빅 2를 압박할만한 포텐셜은 있으니까요. 리가, 그리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좋은 스타트를 끊었죠. 이 호조를 이어나가고 싶어요.



시스템을 정하는 것은 감독.

아라고네스가 윙을 활용하지 않는다면, 그 것에 적응하는 노력을 할 뿐이다.

WSD 팀에서 사이가 좋은 선수는 누군가요?

호아킨 잔뜩 있어요. 카니자레스, 바라하, 알벨다, 비야, 마르체나 같은 경우는 스페인 대표팀에서도 함께 해온 사이니까요. 그 중에서도 카니자레스에 대해서는 선수로서도 인간으로서도 존경하고 있어요. 그 나이(36세)에 그 정도의 활약을 하는 것은 간단한 것이 아니니까요. 프로의 귀감이예요.

WSD 마르체나는 베티스의 숙적, 세비야 유스였는데도요?

호아킨 그래도 좋은 친구니까요 (웃음). 이번 여름만 해도 몇 번이나 전화를 해서, 이적 교섭이 잘 될 수 있기를 바란다고 얘기해줬구요. 역시, 같은 안달루시아 출신의 친구가 있다고 하는 것은 든든해요. 저는 카디스 근교의 푸에르토 데 산타 마리아 출신이고, 마르체나의 고향과도 꽤 가깝죠. 

WSD 존경하는 선수는 피구였지요? 지금도 변하지 않았나요?

호아킨 아아, 그의 모든 것을 존경하고 있어요. 같은 오른쪽 윙어이니까, 언제든 그의 플레이에는 주목해왔어요. 단지, 지금은 피구나 저 같은 전형적인 윙어는 꽤 드물게 되어버렸네요.

WSD 확실히 루센부르고 시대의 마드리드, 아라고네스 감독의 스페인 대표팀 등은 윙어를 두지 않는 시스템을 활용하고 있어요. 이건 시대의 흐름인걸까요?

호아킨 어쨌든 시스템이 먼저가 아니라, 손에 쥐고 있는 선수의 특성에 맞춰서 시스템을 선택하는 것이 저는 중요하다고 생각하지만요.

WSD 하지만 아라고네스가 윙을 두는 4-3-2-1 이나 4-4-2 를 활용한다면 싫진 않겠죠?

호아킨 시스템을 결정하는 것은 감독이예요. 만약, 지금 이후로도 그가 윙을 두지 않는 시스템을 계속 쓴다고 한다면, 저는 그것에 적응하기 위한 노력을 할 뿐이예요. 단지 독일 월드컵의 멤버에도 선발되었었고, 루이스(아라고네스)가 저를 필요로 한다는 확신은 있어요. 

WSD 그 독일 월드컵과 4년전의 한일월드컵, 25세로 벌써 2번째의 월드컵을 경험하고 있는데, 어느쪽이든 좋은 추억이라고는 말할 수 없는 결과로 끝나고 있네요?

호아킨 팀의 최연소로서 참가했던 2002년의 월드컵은 정말로 좋은 경험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단지, 졌었던 준준결승의 한국전에서 마지막에 PK를 실패해버렸던 그 괴로운 기억은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사라지지 않네요. 독일 월드컵도 출장 기회가 한정되어 있는 것에 더해 팀도 16강에서 져버렸고, 만족도는 낮아요.

WSD 자, 마지막으로 축구 선수로서 호아킨의 꿈을 얘기해주겠어요?

호아킨 리가에서 우승하는 것. 우여곡절은 있었지만 저는 운명에 이끌려서 여기 발렌시아에 오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이 "운명의 클럽" 에서 반드시 그 꿈을 이루어내 보일거예요. 그리고 한가지 더, 스페인 대표팀에서 월드컵이나 유로 대회를 제패하는 것. 지금까지 몇 번이라고 할 수 없을만큼 국민들을 실망시켜왔으니까요. 멋진 선수들은 가지고 있고, 슬슬 패주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지 않으면 안되겠죠. 무엇보다, 우선은 빈틈없이 유로 2008 의 출장권을 확보하지 않으면 안되겠지만요.

Posted by Kelly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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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아킨 산체스

(Joaquin Sanchez)
생년월일 : 1981년 6월 21일
국적 : 스페인
신체사항 : 179 cm, 75 kg
포지션 : MF(미드필더)
소속팀 : 레알 베티스 (스페인)

◇ Style

호아킨은 축구 선수로서 파워, 스피드, 테크닉 3박자를 절묘하게 겸비하고 있는 선수다. 그는 윙어로서 매우 다이나믹한 돌파를 펼치는 스타일이며 체력적으로도 완벽하다.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선수 루이스 피구의 영향을 받아 그와 플레이 패턴이 상당히 비슷하다는 특징도 갖고 있다.


◆ In Club

레알 베티스 유스팀 출신의 호아킨은 청소년 시절부터 포르투갈 출신의 수퍼스타 루이스 피구를 존경하며 성장해왔다. 그는 팀이 세군다 리가로 강등되었던 2000년 여름부터 본격적으로 성인팀에서 활약하기 시작했고, 01/02 시즌에 처음으로 프리메라 리가에 그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까지만 해도 호아킨이라는 이름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01/02 시즌을 통해 호아킨이 보여준 활약상은 실로 대단했다. 그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경기에서 호베르투 카를로스를 시종일관 괴롭히며 무서운 돌파 능력을 과시했고, 시즌내내 최고의 플레이를 펼치며 베티스의 UEFA컵 진출에 크게 기여했다.

02/03 시즌에도 '스페인 최고의 신인'이란 이름값에 걸맞는 활약을 선보였던 호아킨은 머지 않아 유럽 최고의 선수 중 한명으로 명성을 떨치게 될 재목감으로 손꼽히고 있는 중이다.

◇ In National Team

2002년 2월, 포르투갈과의 친선 경기에서 국가대표 데뷔전을 치렀던 호아킨은 이 날 기자단이 선정한 '경기 MVP'를 수상했을 정도로 매우 인상적인 활약을 펼쳤다. 이후 카마쵸 감독의 두터운 신임을 확보한 그는 2002' 한/일 월드컵 대표팀 최종 엔트리에 무난히 발탁되었고, 남아공과의 조별예선 3차전, 한국과의 8강전에서 스타팅 멤버로 출전하여 세계 축구팬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기도 했다.

새로운 대표팀 감독 사에스 체제 아래에서도 붙박이 오른쪽 날개로 자리잡고 있는 호아킨은 향후 10년 이상 스페인의 간판으로 활약하게 될 기대주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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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월드컵 스페인과의 8강전..
승부차기할때 이선수가 못넣어줘서 고맙긴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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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승부차기 실축후에 이 표정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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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성통곡하는 모습은 잊지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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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얼마나 맘고생이 심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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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기 끝난 후 .. 완전 암울ㅡㅡ;;
 
인터뷰중 스페인 국가대표팀 생활에 대한 질문을 받자,...........
"월드컵에서의 실수는 아직도 잊혀지지가 않아요.
그러나 저는 아직 젊고, 분명 다시 기회가 올거라 믿고 있습니다.
수없이 실축했던 순간을 되새겼죠.
앞으로 그때와 똑같은 상황이 주어지게 된다면 확실하게 성공시킬 자신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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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 웃는 모습이 너무 좋아보여서^-^
 
 
 
 
▼ 2002월드컵 때 스페인 선수들호텔 피시방에서 찍은거.
호아킨 웃기다..ㅡㅡㅋㅋㅋ
우리나라 초고속 인터넷에 놀랐겠지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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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여도 즐거운 호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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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바지 호아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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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가볍게 머리부텨잡고 웃어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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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보다 발렌시아 사진이 없다..
Posted by Kelly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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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르토 파비앙 아얄라

(Roberto Fabian Ayala)


생년월일:  1973년 4월 14일

국적: 아르헨티나
체사항: 177 cm, 75 kg
포지션:  DF
소속팀:  발렌시아 (ESP)

경력:

2001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에서 우승

2회의 리그 우승, 1회 UEFA 컵을 차지

1991-1994 페로카릴

1994-1995 리버 플레이트

1995-1998 나폴리 (ITA)

1996 : 애틀랜타 올림픽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

1998-2000 AC 밀란 (ITA)

2004 : 아테네 올림픽 아르헨티나 축구 국가대표

1998,2002,2006 : 월드컵 아르헨티나 국가대표

<12년에 걸친 대표팀 출전 경력에 100골 이상 득점>

수상경력:

1996 : 애틀랜타 올림픽 은메달

2004 : 아테네 올림픽 금메달

지난 8년간 아르헨티나 국민들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 것들이 몇 가지 있다. 그 것은 바로 아르헨티나 정치와 경제의 혼란, 목축업의 성황, 그리고 로베르토 아얄라가 있는 이상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수비는 막강하다는 사실이다. 아얄라가 1994년에 대표팀에 선발된 이후 아르헨티나는 세계 최정상급의 수비진을 구축했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아얄라는 1998 FIFA 월드컵™에서 아르헨티나가 참가한 다섯 번의 경기에 모두 주전으로 출전하며 뛰어난 기량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또한 아얄라는 2002 FIFA 월드컵 남미 예선 18경기 중 17경기에서 선발로 출전, 90분을 모두 소화해 냈다. 그는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70경기 이상을 출전한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제공 장악 능력과 강력한 태클 능력을 구비한 아얄라는 일찍부터 세계 최고의 중앙 수비수로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1992년 아르헨티나 리그의 페르로 카릴 오에스테 팀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한 그는 2년 후 아르헨티나의 명문 클럽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하고 곧바로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었다. 리버 플레이트에서의 맹활약을 바탕으로 그는 이탈리아 세리에 A의 나폴리에 입단하여 유럽 축구 무대에 발을 디뎠다. 그는 3년간 나폴리의 간판 수비수로 활약하며 축구 스타로 성장했다.

아얄라는 다시 나폴리를 떠나 이탈리아 명문 클럽인 AC 밀란에 합류하여 팀을 리그 우승으로 이끌면서 전 세계적인 명성을 획득하였다. 밀란의 성공을 뒤로 하고 아얄라는 2000년 9월에 스페인의 발렌시아로 이적했다. 발렌시아는 아얄라를 얻음으로써 스페인과 유럽 축구 무대에서 막강한 팀으로 거듭나게 되었다.

강력한 태클과 투지를 자랑하는 로베르토 아얄라는 지난 10년 동안 아르헨티나 수비의 핵으로 자리잡으면서 유럽에서도 세계 최고의 수비수라는 명성에 걸맞은 활약을 보여주고 있다.

국가 대표팀

로베르토 아얄라는 2002 FIFA 월드컵에 아르헨티나의 주장으로 출전했으나 나이지리아와의 조별리그 1차전을 앞두고 몸을 푸는 도중 부상당하는 바람에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아르헨티나가 16강 진출에 실패한 것을 보면 아얄라가 대표팀에서 얼마나 중요한 존재였는지를 알 수 있다. 아얄라는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획득했고 2004년 여름에는 코파 아메리카 결승전에서 숙명적인 라이벌 브라질에 패한 아르헨티나 대표팀의 일원이었다. 아르헨티나는 그 해 여름 아테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차지했으나 아얄라는 파라과이와의 결승전에서 부상당해 2개월 동안 경기에 나서지 못했다.

클럽
부에노스 아이레스의 페로 카릴 오에스테에서 선수 생활을 시작해 3년 동안 좋은 성적을 거둔 뒤, 당시 다니엘 파사레야 감독이 이끌던 같은 도시 라이벌 리버 플레이트로 이적했다. 파사레야는 나중에 아르헨티나 감독을 맡아 1994년 아얄라에게 국제경기 데뷔 기회를 주기도 했다. 아얄라는 리버 플레이트에서 리그 우승을 차지했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거부할 수 없는 유럽 리그 진출의 유혹이 그를 찾아왔다.

1995: 나폴리에 입단해 3년 동안 맹활약으로 명성을 떨쳤다.

1998: 아르헨티나 출신으로는 30년 만에 처음으로 AC 밀란 선수가 됐으나 1군 출장 기회는 쉽게 찾아오지 않았다. 밀란이 우승을 차지한 첫 시즌에는 11경기에 출장했고 밀란 소속으로 총 24경기에 출장하는 데 그쳤다.

2000: 2000년 여름 6백5십만 유로에 3년 계약을 맺고 발렌시아로 이적해, 첫 시즌 38경기에서 단 34골만 허용한 발렌시아의 철벽 수비를 지휘했다. 아얄라는 발렌시아가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패하는 바람에 우승컵을 들어올리지는 못했지만 다음해에는 프리메라리가 우승을 차지했다. 사실, 아얄라는 시즌 종료 1주 전 말라가와의 경기에서 첫 번째 골을 터뜨려 발렌시아가 승리를 거두고 우승을 확정 짓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2003/04: 9월에 계약을 2년 연장해 2007년까지 메스타야에 남게 됐다. 30경기에 출장하면서 발렌시아는 스페인 리그 우승을 차지했고 UEFA컵 결승전에서 마르세이유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렸다.

알고 계셨나요?
‘엘 라톤(생쥐)’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는 아얄라는 중앙 수비수였던 아버지로부터 특유의 점프력을 물려받았다.


국대에서




발렌시아에서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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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비드 알벨다 : David Albeldar 
다비드 비야 : David Villa 
호아킨 산체스 : Joaquin Sanchez 
비센테 로드리게스 : Vicente Rodriguez 
라울 알비올 : Raul Albiol 

몸이 불편한 아이들과 좋은 의미로 캘린더 화보 촬영을 한 발렌시아 선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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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센테 로드리게스 기옌

(Vicente Roderiguez Guillen)

생년월일: 1981년 7월 16일

출생지: 스페인 발렌시아
국적: 스페인
신체조건: 176cm, 74kg
포지션: 왼쪽 날개

현클럽: 발렌시아(2000~)
이전클럽: 레반테(1997~2000)
주요경력:

00/01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01/02, 03/04 시즌 프리메라 리가 우승,

03/04 시즌 UEFA컵 우승,

03/04 시즌 UEFA 수퍼컵 우승,

03/04 시즌 프리메라 리가 올해의 영플레이어스.

빠른 왼발과 골 결정력을 겸비한 미드필더인 비센테 로드리게스는 왼쪽에서 올리는 위협적인 크로스로 상대를 끊임 없이 괴롭히는 선수이다.

국가 대표팀
1981에 태어난 비센테는 1998년 16세 이하 유럽선수권대회에서 3위에 오른 스페인 팀의 일원이었으며 21세가 되기 전에 스페인 국가대표로 발탁돼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그는 2001년 9월 월드컵 유럽지역예선 오스트리아와의 경기에서 국가대표로 데뷔했으며, 이 경기에서 스페인이 4-0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나 비센테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지는 못했다. 월드컵 대표팀에 제외되었던 한을 풀기라도 하듯 비센테는 스페인의 유로 2004 예선 6조의 8경기에 모두 출장했고, 스페인은 그리스에 이어 조 2위를 차지했다. 비센테는 노르웨이와의 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정확한 오른발 슛으로 1골을 터뜨렸고, 스페인이 합계 5-1로 노르웨이를 꺾고 본선에 진출했다. 비센테는 포르투갈에서 열린 본선에서 스페인의 3경기에 모두 출장했다.

클럽
비센테는 발렌시아 인근에 위치한 2부 리그의 레반테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으며 1997/98 시즌에 프로경기 데뷔전을 치렀다.

2000: 비센테는 2000년 여름 발렌시아로 이적해 첫 시즌 동안 33경기에 출장해 5골을 기록했다. 그는 챔피언스리그에도 13경기에 출장했으나 바이에른 뮌헨과의 결승전에서는 벤치를 지켰다. 발렌시아 출신인 비센테는 2001/02 시즌에 주전 선수 자리를 확보하면서 팀의 우승에 기여했고, 발렌시아가 2002/03 시즌 챔피언스리그 8강에서 인테르에 패해 탈락할 때까지 유럽 무대 경험을 쌓기도 했다.

2003/04: 비센테는 발렌시아가 UEFA컵과 프리메라리가 준우승을 차지하기까지 결정적인 골을 터뜨리면서 메스타야에서 최고의 시즌을 보냈다. 그는 UEFA컵 결승전에서 페널티킥으로 선제골을 터뜨린 후 미스타의 결승골을 정확한 크로스로 어시스트해 우승의 주역이 됐다.

알고 계셨나요?
레반테의 베드로 비야로엘 회장은 비센테가 십대였을 때 그를 붙잡아 두기 위해 1억5천만 유로의 매입 조항을 계약서에 추가한 적이 있다.
1981년 7월 16일 발렌시아에서 태어난 비센테는, 비슷한 또래 선수들인 사비(21, 바르셀로나)나 이케르 카시야스(20, 레알 마드리드), 파블로 쿠냐고(22, 입스위치 타운) 등이 세계 청소년 선수권 대회를 통해 스타급 선수로 발돋움 한 것에 비하면 거의 무명선수나 다름없지만, 지금은 그들보다 더 나은 평가를 받고 있는 스페인 최고의 유망주이다.

중학교 시절 레반테(발렌시아를 연고로 하는 클럽으로 현재 세군다 리가에 소속) 유스팀에 입단한 비센테는, 97년 불과 16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 성인팀으로 승격된다. 이는 곧 클럽에서 그의 무한한 잠재력을 인정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보답하듯 비센테는 하루가 다르게 성장하기 시작했고 성인팀 진입 2년 만인 99-00시즌 주전 자리를 차지함과 동시에 스페인 청소년 대표팀(17세 이하)에 발탁되는 기쁨을 맞이하게 된다. 당시 레방테의 감독이었던 호세 바라게르는 "비센테는 머지않아 스페인에 큰 보물로 성장할 것이다. 그의 빠른 스피드와 개인기는 정말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극찬했다.

이렇게 서서히 주목을 받아가던 비센테가 결정적으로 자신의 존재를 알리기 시작한 계기는, 가나를 2-1로 물리치고 스페인을 우승으로 이끌었던 99 메리디언 컵(Meridian Cup)이라 할 수 있겠다. 이 대회에서 보여준 그의 활약은 99-00시즌 발렌시아 지휘봉을 잡았던 명장 엑토르 쿠페르(現인터 밀란)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고, 결국 비센테는 쿠페르의 열렬한 구애 공세를 받아들여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팀에 합류하기로 결심한다.(메리디안 컵 : 유럽축구연맹(UEFA)과 아프리카 축구연맹(CAF)이 유로96 기간 중 기획한 대회로 두 대륙의 원만한 교류가 주목적이다. 주인공들은 만 17세 이하의 전도 유망한 선수들로, 유럽과 아프리카 각각 4팀씩 참가한다. 또한 2년마다 양 대륙을 오가며 개최된다. 비센테가 참가한 99년도에는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개최되었고, 포르투갈이 97년 초대 우승을 차지했었다. 2001년 이탈리아 대회서부터는 대회 방식에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A,B조로 나누어 풀리그를 치른 뒤 상위 두 팀이 크로스 토너먼트로 준결승과 결승전을 치른 종전 방식과 달리, 8개팀이 한 조를 이루고 서로 다른 대륙 팀과 대전한 뒤 가장 좋은 성적을 거둔 팀이 우승을 차지하는 방식.)

꿈에서만 그려오던 프리메라 리가(1부 리그)와 CL 무대를 밟게 된 비센테에게 00-01시즌은, 비록 팀이 CL 준우승과 진출 티켓을 획득하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았지만 행운도 많이 따라준 1년이었다. 의외로 빨리 찾아온 프리메라 리가 데뷔전(2000년 9월 16일 對마요르카)에서 데뷔골까지 기록했으며, 2001년 3월 28일 세계 최강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 스페인 국가대표 감독 호세 안토니오 카마쵸에 의해 후반 28분 교체 투입, A-매치에도 첫 발을 내딛기도 했다.

약 두 달간의 방학을 마치고 지난 8월 속개된 01-02시즌 레알 마드리드와의 개막전에서의 비센테는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마치 이날의 주인공은 지단이 아닌 자신이라고 시위라도 하듯, 빠른 스피드와 탁월한 개인기로 상대 오른쪽 수비를 뒤흔들어 팀이 1-0으로 승리하는데 절대적인 수훈갑이 되었으며, 오스트리아와의 2002 한일 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도 그의 왼쪽 돌파는 유난히 빛이 났다. 지난 시즌의 아쉬움을 모두 털어 내는 순간이었다. 비센테의 이런 환상적인 플레이에 매료된 유럽 최고 명문 클럽들은 최근 그의 낮은 연봉과 바이-아웃 조항(약 3,700만$)액을 이용한 영입 움직임을 보이고 있어, '라이징 스타'의 값어치를 실감한 발렌시아는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처우개선을 해주어야 할 형국에 처했다.

지난 9월 5일 스페인은 리히텐슈타인을 2-0으로 제압하고 내년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었다. 이 말은 곧 그의 화려한 돌파를 우리 눈으로 직접 볼 수 있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다. 데포르티보 라 코루냐의 마뉴엘 파블로처럼 다리가 부러지는 큰 부상만 당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비센테는 다가오는 바로 그 무대를 발판으로 스페인뿐만 아니라 세계 최고의 왼쪽 날개로의 도약이란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발렌시아의 왼쪽 날개 비센테 로드리게스는 스페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거듭나기까지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03/04 시즌 발렌시아의 2관왕을 주도한 이후, 비센테는 베니테스 감독의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마초에게 외면당한 비센테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땀을 흘렸고, 베니테스 감독은 비센테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벤투스의 단장 루치아노 모지가 '제 2의 프란시스코 헨토'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을 때만 하더라도 비센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스페인 축구의 미래처럼 여겨졌다. 비센테의 에이전트는 이탈리아 신문들이 '제 2의 헨토'가 유벤투스 행을 원하고 있다는 소문을 끊임 없이 보도하는 바람에 이리저리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발렌시아는 결국 비센테를 붙잡기 위해 6000만 유로의 바이-아웃 조항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비센테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01/02 시즌 개막전에서도 승리의 선봉장 역할을 해내며 화제가 되었지만, 시즌 중반부터는 자신이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젊은 선수임을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발렌시아는 무려 30년만에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그 중심에 비센테의 자리는 없었다. 바라하, 킬리, 아이마르 등이 발렌시아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비센테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스페인 대표팀의 신델레라 자리 또한 81년생의 동갑내기 호아킨에게 내줘야 했다. 당시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카마초 감독은 호아킨의 재능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마초는 호아킨을 가리켜, '윙어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선수'라 극찬했다. 반면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된 비센테에 관해서는 "데 페드로에 비해 활약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데 페드로는 월드컵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스페인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비센테의 이름은 점점 잊혀져 갔다.

이러한 현실에 비센테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저는 더욱 성장해야만 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다시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며 매우 진취적인 태도를 보였다. 01/02 시즌 발렌시아의 우승을 이끈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은 비센테가 슬럼프에 빠져든 원인을 진단했다. 비센테는 자신의 스피드와 개인기에 지나친 믿음을 갖고 있었고, 주위의 동료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오른발이 매우 부정확했으며, 크로스의 날카로움 또한 결여되어 있었다. 2002년 여름을 통해 비센테는 왼발 킥을 집중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참고가 되었던 인물은 바로 세계 최고의 키커 데이빗 베컴이었다. 비센테는 베컴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고, 킥 연습에 몰두하며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나갔다. 킬리 곤살레스 또한 훌륭한 스승이었다. 비센테는 유로 2004에서 맹활약한 이후, 킬리가 자신에게 있어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아이마르, 알벨다, 바라하 등도 비센테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수비수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이마르의 재능은 비센테로 하여금 커다란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비센테는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로 가득 차 있는 전형적인 노력형의 선수였다.

발렌시아 구단 또한 '프렌차이즈 스타' 비센테의 성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 대표적 인물은 회장 하이메 오르티였다. 오르티는 클럽의 재정과 비센테에게 보다 많은 경험을 주기 위해 킬리 곤살레스의 방출을 고려하기도 했다. 킬리가 바르셀로나 또는 인터 밀란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발렌시아 써포터들은 클럽의 메인 오피스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발렌시아 보드는 써포터들의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01/02 시즌 챔피언에 올랐지만, 가이스카 멘디에타, 클라우디오 로페스, 프란시스코 파리노스, 헤라르드 로페스와 같은 스타들이 팀의 재정을 위해 줄줄이 팀을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오르티 회장은, "우리 팀의 재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킬리는 훌륭한 선수이지만, 우리에겐 젊고 유망한 비센테가 있습니다." 라며 써포터들에게 이해를 부탁했다. 그러나 발렌시아의 팬들은 구단의 입장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풋내기 비센테가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날개 중 한 명인 킬리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는 킬리의 방출을 추진했지만 과도한 이적료를 요구하는 바람에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베니테스 감독은 여전히 비센테의 후원자였다. 킬리가 잔류했음에도 불구, 02/03 시즌 초반부터 비센테는 발렌시아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센테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못했고, 언론과 써포터들은 베니테스 감독의 판단에 물음표를 던졌다. 점점 추락하기 시작한 디펜딩 챔피언 발렌시아는 시즌 후반부에 이르러 우승은 커녕 UEFA컵 진출조차 어려운 상태에 도달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도 인터 밀란의 골키퍼 톨도의 신들린듯한 활약에 가로막혀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러나 비센테는 킬리의 부상을 틈타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점점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즌 막바지에 발렌시아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또한 비센테와 아우렐리우의 활약 덕분이었다. 스페인 대표팀의 사에스 감독 역시 비센테를 붙박이 주전으로 기용하며 두터운 신임을 나타냈고, 발렌시아의 팬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태어난 프렌차이즈 스타를 점점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03/04 시즌, 무딘 창끝처럼 날카로움이 부족했던 비센테의 왼발은 어느새 '명검'으로 변해 있었다. 발렌시아는 비센테와 함께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시즌 후반 들어 레알 마드리드와 데포르티보가 우승권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발렌시아의 독주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비센테가 데포르티보와의 경기에서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3-0 완승을 이끌어냈을 때, 사람들은 마르고 힘없던 풋내기 선수가 어느덧 스페인 최고의 선수로 성장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UEFA컵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친 비센테는 시즌 12골, 7어시스트를 기록했고, 'El Pais'에서 선정하는 프리메라 리가 최우수 스페인 선수로 손꼽혔다.

스페인 언론들은 이제 라울이 아닌 비센테가 스페인 최고의 선수일 것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비센테는 언론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로 2004 대회 동안 라울이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을 때에도 팀의 주장을 옹호했다. 그는, "라울은 우리 팀의 캡틴이며, 반드시 필요한 선수입니다. 저는 라울과 함께 뛸 때 좀 더 편안하게 측면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측면 쪽으로 볼을 빠르게 넘겨주는 동시에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를 능숙하게 찾아냅니다. 저는 라울이 여전히 스페인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위기의 캡틴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스페인은 유로 2004에서 실패했지만 비센테와 호아킨 양날개가 대표팀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호아킨이 2002년 월드컵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동안 비센테는 TV로 그 모습을 시청해야 했고, 비센테가 유로 2004의 스타로 떠오르는 동안 호아킨은 벤치와 그라운드를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스페인이 2006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면, 사람들은 비로소 81년생 동갑내기 양쪽 날개가 함께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전문가들 또한 비센테와 호아킨이 향후 10년간 대표팀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날개들임을 강조한다. 레예스, 루케, 가르시아 등은 공격수와 윙어 역할을 모두 소화해낼 수 있는 다재다능한 재능임이 분명하나, 비센테만큼 측면에서의 '스페셜리스트'는 아니다. 또한 비센테와 호아킨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재능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상대 수비라인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에 있어서는 비센테보다 호아킨 쪽이 우세함을 나타낸다. 하지만 호아킨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돌파력으로 경기를 풀어나갈 수 없을 때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비센테는 호아킨에 비해 동료들을 활용하는데 능숙하며,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경기를 풀어갈 수 있다.

2년 전,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 밀려 힘없이 쓰러지던 풋내기 비센테는 이제 빠르고, 강인하며, 날카로운 왼발을 지닌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이제 비센테가 갖고 있는 재능의 카테고리에 실로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비수들을 돌파할 수 있는 개인기, 평범한 스트라이커 이상의 골감각,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할 수 있는 체력, 감독의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 경기를 결정짓는 승부사적 기질까지. '노력하는 천재' 비센테의 카테고리에 앞으로 무엇이 더 추가될지 두고 볼 일이다.

국대에서

발렌시아에서

 
발렌시아

- 레반테 유스팀에서 선수생활을 시작했다.
- 엑토르 쿠페르 감독의 눈에 띄어 발렌시아로 영입되었다.
- 2000년 9월 16일, 마요르카 전에서 프리메라 리가 데뷔전을 치렀다.
- 00/01 시즌 발렌시아의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주역으로 맹활약했다.
- 지네딘 지단은 자신의 프리메라 리가 공식 데뷔전에서 비센테를 막지 못해 레알 마드리드가 패배했다고 말했다.
- 유벤투스 단장 루치아노 모지는 비센테의 영입을 위해 바이-아웃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3400만 유로를 지불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 또한 모지는 비센테에게 '제 2의 헨토(레알 마드리드의 전설적인 윙어)'라는 수식어를 붙여주었다.
- 발렌시아는 비센테를 붙잡아두기 위해 바이-아웃 조항에 명시되어 있는 금액을 6000만 유로로 상향 조정해야 했다.
- 03/04 시즌, 12골·7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프리메라 리가 최우수 스페인 선수로 선정되었다.
- 마르세이유와의 UEFA컵 결승전에서 1골 1어시스트를 기록, 팀 우승에 견인차 역할을 해냈다.
- 04/05 시즌에는 부상으로 인해 많은 경기에 출전하지 못했다.


스페인 대표팀

- 2001년 3월 28일 프랑스와의 경기를 통해 A매치에 데뷔했고 스페인은 2-1로 승리했다.
- 발렌시아의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은 비센테가 미래의 스페인을 이끌 것이라고 말했다.
- 그러나 비센테는 슬럼프에 빠졌고, 카마초 감독은 그를 월드컵 대표팀에서 제외시켰다.
-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넘겨받은 사에스 감독은 비센테를 다시금 중용하기 시작했다.
- 라울과 함께 유로 2004 지역예선에서 가장 뛰어난 활약을 보여준 스페인 선수로 손꼽혔다.
- 유로 2004 본선 러시아 전에서 경기 MVP로 선정되었다.
- MBC에서 선정한 유로 2004 조별예선 베스트 11에 포함되었다.


스페인 최고의 윙어가 되기까지

- 스페인 언론들은 2002년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된 비센테가 데 페드로만큼 좋은 크로스를 올릴 수 없다고 말했다.
- 드리블에 비해 킥력이 좋지 못했던 비센테는 오른발 킥 한 방으로 경기를 바꿔버릴 수 있는 데이빗 베컴을 크게 동경했다.
- 비센테는 베컴이 어린 시절부터 매일매일 셀 수 없는 숫자의 킥 연습을 반복했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 월드컵에 참가할 수 없었던 비센테는 2002년 여름부터 킥 연습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킬리 곤살레스는 스승 역할을 했다.
- 베니테스 감독은 비센테로 하여금 왼발 뿐 아니라 오른발 연습에도 신경쓰게 했다.
- 비센테는 02/03 시즌 데포르티보 전에서 오른쪽 날개로 출전, 팀 승리를 주도하며 맹활약했다.
- 비센테는 수비수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이마르의 볼 컨트롤을 보며 많은 것을 배운다고 말했다.
- 아이마르는 비센테가 발렌시아의 03/04 시즌 2관왕을 주도하는 모습을 보고 그의 팬이 되었다고 말했다.
- 2002년 월드컵을 앞두고 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감독은 오른쪽 날개 호아킨이 스페인 대표팀을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 유로 2004를 앞두고 오른쪽 날개 호아킨은 비센테야말로 스페인 대표팀을 바꿀 수 있는 선수라고 말했다.
- 2002년 여름, 발렌시아 써포터들은 왼쪽 날개 킬리가 팀을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을 듣고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 2004년 여름, 발렌시아 써포터들은 왼쪽 날개 킬리가 팀을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 03/04 시즌, 스페인 언론 'AS'는 비센테를 프리메라 리가에서 최고의 크로스를 날리는 윙어 중 한 명이라고 평가했다.
- 비센테는 현재 메스타야 스타디움의 인기 No.1이다.
- 2004년 여름, 이탈리아 선수들이 대거 영입되자 이탈리아어 공부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발렌시아의 왼쪽 날개 비센테 로드리게스는 스페인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으로 거듭나기까지 순탄치 않은 과정을 겪어야만 했다. 03/04 시즌 발렌시아의 2관왕을 주도한 이후, 비센테는 베니테스 감독의 믿음이 없었다면 지금의 위치에 오를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카마초에게 외면당한 비센테는 그 누구보다도 열심히 땀을 흘렸고, 베니테스 감독은 비센테에게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고 있었다.

유벤투스의 단장 루치아노 모지가 '제 2의 프란시스코 헨토'가 나타났다고 소리쳤을 때만 하더라도 비센테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스페인 축구의 미래처럼 여겨졌다. 비센테의 에이전트는 이탈리아 신문들이 '제 2의 헨토'가 유벤투스 행을 원하고 있다는 소문을 끊임 없이 보도하는 바람에 이리저리 바삐 움직여야만 했다. 발렌시아는 결국 비센테를 붙잡기 위해 6000만 유로의 바이-아웃 조항을 체결할 수 밖에 없었다.

비센테는 레알 마드리드와의 01/02 시즌 개막전에서도 승리의 선봉장 역할을 해내며 화제가 되었지만, 시즌 중반부터는 자신이 아직 배울 것이 많은 젊은 선수임을 절실히 깨달아야 했다. 발렌시아는 무려 30년만에 리그 타이틀을 차지했지만, 그 중심에 비센테의 자리는 없었다. 바라하, 킬리, 아이마르 등이 발렌시아의 영웅으로 떠올랐고, 비센테의 이름은 거론되지 않았다.

스페인 대표팀의 신델레라 자리 또한 81년생의 동갑내기 호아킨에게 내줘야 했다. 당시 스페인 대표팀의 지휘봉을 잡고 있던 카마초 감독은 호아킨의 재능을 칭찬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카마초는 호아킨을 가리켜, '윙어로서 갖춰야 할 모든 것을 갖고 있는 선수'라 극찬했다. 반면 월드컵 엔트리에서 제외된 비센테에 관해서는 "데 페드로에 비해 활약이 좋지 못했기 때문"이라며 무관심한 태도를 보였다. 이후 데 페드로는 월드컵에서 가장 좋은 활약을 펼친 스페인 선수 중 한 명으로 손꼽혔고, 비센테의 이름은 점점 잊혀져 갔다.

이러한 현실에 비센테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인터뷰를 통해, "저는 더욱 성장해야만 합니다. 부족한 부분을 보완하여 다시 대표팀에 발탁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라며 매우 진취적인 태도를 보였다. 01/02 시즌 발렌시아의 우승을 이끈 라파엘 베니테스 감독은 비센테가 슬럼프에 빠져든 원인을 진단했다. 비센테는 자신의 스피드와 개인기에 지나친 믿음을 갖고 있었고, 주위의 동료들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했다. 또한 오른발이 매우 부정확했으며, 크로스의 날카로움 또한 결여되어 있었다. 2002년 여름을 통해 비센테는 왼발 킥을 집중적으로 보완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이 과정에서 많은 참고가 되었던 인물은 바로 세계 최고의 키커 데이빗 베컴이었다. 비센테는 베컴으로부터 자극을 받았고, 킥 연습에 몰두하며 자신의 약점을 보완해 나갔다. 킬리 곤살레스 또한 훌륭한 스승이었다. 비센테는 유로 2004에서 맹활약한 이후, 킬리가 자신에게 있어 스승과도 같은 존재였음을 인정하기도 했다. 아이마르, 알벨다, 바라하 등도 비센테의 발전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특히 수비수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아이마르의 재능은 비센테로 하여금 커다란 부러움을 느끼게 했다. 비센테는 언제나 배우려는 자세로 가득 차 있는 전형적인 노력형의 선수였다.

발렌시아 구단 또한 '프렌차이즈 스타' 비센테의 성장에 많은 기대를 걸었다. 그 대표적 인물은 회장 하이메 오르티였다. 오르티는 클럽의 재정과 비센테에게 보다 많은 경험을 주기 위해 킬리 곤살레스의 방출을 고려하기도 했다. 킬리가 바르셀로나 또는 인터 밀란으로 떠날지도 모른다는 소식이 들려 왔고, 발렌시아 써포터들은 클럽의 메인 오피스 앞에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기에 이르렀다. 발렌시아 보드는 써포터들의 믿음을 잃어가고 있었다. 01/02 시즌 챔피언에 올랐지만, 가이스카 멘디에타, 클라우디오 로페스, 프란시스코 파리노스, 헤라르드 로페스와 같은 스타들이 팀의 재정을 위해 줄줄이 팀을 떠나갔기 때문이었다.

오르티 회장은, "우리 팀의 재정은 매우 어렵습니다. 킬리는 훌륭한 선수이지만, 우리에겐 젊고 유망한 비센테가 있습니다." 라며 써포터들에게 이해를 부탁했다. 그러나 발렌시아의 팬들은 구단의 입장을 이해해주지 않았다. 그들은 풋내기 비센테가 프리메라 리가 최고의 날개 중 한 명인 킬리의 빈자리를 대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발렌시아는 킬리의 방출을 추진했지만 과도한 이적료를 요구하는 바람에 협상은 결렬되고 말았다.

베니테스 감독은 여전히 비센테의 후원자였다. 킬리가 잔류했음에도 불구, 02/03 시즌 초반부터 비센테는 발렌시아의 붙박이 주전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비센테의 활약은 두드러지지 못했고, 언론과 써포터들은 베니테스 감독의 판단에 물음표를 던졌다. 점점 추락하기 시작한 디펜딩 챔피언 발렌시아는 시즌 후반부에 이르러 우승은 커녕 UEFA컵 진출조차 어려운 상태에 도달했다. 마지막 희망을 걸었던 챔피언스 리그 8강에서도 인터 밀란의 골키퍼 톨도의 신들린듯한 활약에 가로막혀 패배의 쓴잔을 들이켜야 했다.

그러나 비센테는 킬리의 부상을 틈타 풍부한 경험을 쌓았고, 점점 성숙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시즌 막바지에 발렌시아가 힘을 낼 수 있었던 것 또한 비센테와 아우렐리우의 활약 덕분이었다. 스페인 대표팀의 사에스 감독 역시 비센테를 붙박이 주전으로 기용하며 두터운 신임을 나타냈고, 발렌시아의 팬들은 자신들의 고향에서 태어난 프렌차이즈 스타를 점점 자랑스럽게 여기기 시작했다.

03/04 시즌, 무딘 창끝처럼 날카로움이 부족했던 비센테의 왼발은 어느새 '명검'으로 변해 있었다. 발렌시아는 비센테와 함께 승승장구하기 시작했다. 시즌 후반 들어 레알 마드리드와 데포르티보가 우승권에서 점점 멀어져 갔고, 발렌시아의 독주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비센테가 데포르티보와의 경기에서 2골 1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3-0 완승을 이끌어냈을 때, 사람들은 마르고 힘없던 풋내기 선수가 어느덧 스페인 최고의 선수로 성장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UEFA컵에서도 발군의 활약을 펼친 비센테는 시즌 12골, 7어시스트를 기록했고, 'El Pais'에서 선정하는 프리메라 리가 최우수 스페인 선수로 손꼽혔다.

스페인 언론들은 이제 라울이 아닌 비센테가 스페인 최고의 선수일 것이라 극찬했다. 그러나 비센테는 언론의 평가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유로 2004 대회 동안 라울이 집중적인 비난을 받고 있을 때에도 팀의 주장을 옹호했다. 그는, "라울은 우리 팀의 캡틴이며, 반드시 필요한 선수입니다. 저는 라울과 함께 뛸 때 좀 더 편안하게 측면에서 활약할 수 있습니다. 그는 측면 쪽으로 볼을 빠르게 넘겨주는 동시에 골을 넣을 수 있는 위치를 능숙하게 찾아냅니다. 저는 라울이 여전히 스페인 최고의 선수라고 생각합니다." 라며 위기의 캡틴에게 힘을 실어주는 모습을 보였다.

비록 스페인은 유로 2004에서 실패했지만 비센테와 호아킨 양날개가 대표팀의 보물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던 것은 크나큰 수확이었다. 호아킨이 2002년 월드컵에서 깊은 인상을 남기는 동안 비센테는 TV로 그 모습을 시청해야 했고, 비센테가 유로 2004의 스타로 떠오르는 동안 호아킨은 벤치와 그라운드를 들락날락거려야 했다. 스페인이 2006년 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다면, 사람들은 비로소 81년생 동갑내기 양쪽 날개가 함께 호흡을 맞추는 모습을 마음껏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스페인의 전문가들 또한 비센테와 호아킨이 향후 10년간 대표팀을 이끌어나갈 수 있는 날개들임을 강조한다. 레예스, 루케, 가르시아 등은 공격수와 윙어 역할을 모두 소화해낼 수 있는 다재다능한 재능임이 분명하나, 비센테만큼 측면에서의 '스페셜리스트'는 아니다. 또한 비센테와 호아킨은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른 종류의 재능을 갖고 있다. 예를 들어, 상대 수비라인을 단번에 무너뜨리는 파괴력에 있어서는 비센테보다 호아킨 쪽이 우세함을 나타낸다. 하지만 호아킨은 자신이 갖고 있는 돌파력으로 경기를 풀어나갈 수 없을 때 약점을 드러내기도 한다. 반면 비센테는 호아킨에 비해 동료들을 활용하는데 능숙하며,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경기를 풀어갈 수 있다.

2년 전, 수비수들과의 몸싸움에 밀려 힘없이 쓰러지던 풋내기 비센테는 이제 빠르고, 강인하며, 날카로운 왼발을 지닌 최고의 윙어 중 한 명으로 성장했다. 우리는 이제 비센테가 갖고 있는 재능의 카테고리에 실로 많은 것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수비수들을 돌파할 수 있는 개인기, 평범한 스트라이커 이상의 골감각, 적극적으로 수비에 가담할 수 있는 체력, 감독의 전술을 이해하는 능력, 경기를 결정짓는 승부사적 기질까지. '노력하는 천재' 비센테의 카테고리에 앞으로 무엇이 더 추가될지 두고 볼 일이다.


P.R.O.F.I.L.E

성명: 비센테 로드리게스(Vicente Roderiguez Guillen)
생년월일: 1981년 7월 18일
국적: 스페인
신체조건: 176cm, 74kg
포지션: 왼쪽 날개
클럽: 레반테(1997~2000), 발렌시아(2000~)
주요경력: 00/01 시즌 챔피언스 리그 준우승, 01/02, 03/04 시즌 프리메라 리가 우승, 03/04 시즌 UEFA컵 우승, 03/04 시즌 UEFA 수퍼컵 우승, 03/04 시즌 프리메라 리가 올해의 스페인 선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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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elly C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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