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보름 정도 컴터를 24시간 구동해서 받았다.. ㅠ
경기 화질은 흑백에 사람을 잘 확인하기 힘든정도다..ㅋ
팀은 바지가 밝으냐 어둡냐로 판단 가능하다. 그러나 원래부터 아는 선수가 없으니 선수 확인은 힘들다.. 그래서 그때의 정보를 얻어보고자 인터넷을 항해하기로 했다..
http://blog.naver.com/ojr723?Redirect=Log&logNo=150031703138
유럽선수권대회의 성장 속에, 스페인은 홈 어드밴티지와 강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유로1964에서 자신들의 유일한 우승을 이뤘다.
참가국의 증가
예선 이후 4팀이 자웅을 겨루는 최종대회의 형식은 유지됐지만,? 64년 대회는 참여국의 숫자가 전 대회의 17개국에서 29개국으로 증가했다. 이탈리아와 잉글랜드 역시 참여했고, 잉글랜드는 알프 람지 감독의 데뷔무대에서 프랑스에게 최종 스코어 6-3으로 무릎을 꿇었다. 이번 대회 역시 유로 1960에서와 같이 외교적인 문제로 인해 그리스가 전쟁 중이던 알바니아와의 경기를 거부했다. 결국 알바니아는 부전승으로 다음 라운드에 진출했다.
덴마크의 환호
하지만, 알바니아는 16강에서 덴마크에 종합스코어 4-1로 패하며 탈락했다. 덴마크는 8강에서 룩셈부르크를 물리치며 최종대회에 진출했다. 덴마크의 스트라이커 올레 매드슨은 룩셈브루크와의 3경기에서 총 6골을 폭발시켰다. 룩셈부르크는 로테르담에서 네덜란드를 2-1로 물리치고 (1995년 이전까지 유럽 국가와의 원정 경기에서 룩셈부르크가 거둔 마지막 승리) 8강에 진출했었다.
개최국 스페인
헝가리는 쇠퇴하는 프랑스 대표팀을 물리치고 개최국 스페인, 러시아 함께 4강에 합류했다. 특히 스페인은 이전 라운드에서 아일랜드를 종합스코어 7-1로 대파하며 강한 인상을 남겼다. 유로 1960 당시 스페인은 프랑코 장군이 소련 대표팀의 입국을 반대하며 탈락했지만, 정치적 문제들이 해소된 4년 후에는 양 국가 모두 축구에만 집중했다.
소련의 파괴력
소련은 바르셀로나에서 덴마크를 3-0으로 대파하며 2회 연속 우승에 대한 의지를 보였다. 이 경기에서 유로 1960의 베테랑들인 발렌틴 이바노프와 빅토르 포네델니크는 각각 한 골씩을 넣었다. 스페인과 헝가리의 4강전에서는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 출신 공격수 아만시오가 연장에서 결승골을 넣으며 스페인의 2-1 승리를 이끌었다. 스페인은 인테르 소속으로 이미 유럽 챔피언 자리에 오른 미드필더 루이스 수아레스의 경험에 자신감을 안고 결승에 나섰다.
강한 팀워크
등번호 10번의 수아레스는 결승에서 전반 6분만에 헤수스 페레다에게 훌륭한 크로스로 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소련은 갈림지안 쿠사이노프가 곧이어 동점골을 넣었다. 하지만, 스페인은 후반 39분 마르셀리노가 헤딩 결승골로 승부를 마무리했다. 수아레스는 "유로 1964에서의 스페인 대표팀은 내가 경험한 최고의 스페인 팀은 아니었다. 하지만, 당시의 대표팀은 스타들만이 존재하는 팀이 아닌 강한 팀워크를 바탕으로 한 진정한 팀이었다"고 말했다.
http://suparobo.kr/186
Luis Suarez : From Wikipedia
루이스 수아레스, 국내에는 거의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는 스페인의 전설적인 명선수 입니다. FC바르셀로나와 인테르밀란에서 놀라운 활약을 펼쳤으며, 유로64의 우승주역이기도 합니다. 1960년 발롱도르까지 수상한 바 있는 명선수 루이스 수아레스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프로필
이름 : Luis Suarez Miramontes
생년월일 : 1935년 5월 2일
신장/체중 : 172cm / 70kg
포지션 : MF, FW
국적 : 스페인
국가대표 : 32시합 14득점
건축가 라고 불리던 레전드, 루이스 수아레스 이야기.
루이스 수아레스의 우승 경력은 화려함 그 자체입니다. 스페인 라리가 2회 우승, 세리에 A 3회 우승, 챔피언스리그 2연패, 유로 우승까지, 개인으로도 유럽최우수선수상까지 받았습니다. 다만, 그 뛰어난 실력에 비해서 인지도가 별로 없는 것이 조금은 묘하군요. 그는 지금까지도 인테르밀란 사상 최고의 10번이었다고 평가받기도 합니다.
1953년 수아레스는 18살의 나이로 프로데뷔를 하게 됩니다. 이미 수아레스는 데포르티보 하부조직에서 훌륭한 유망주로 눈에 확 띄는 플레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만 해도, 프리메라리가에서는 18세 미만인 선수의 경우 하부조직에서는 뛸 수 있어도 톱팀에는 합류할 수 없다는 룰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랬기 때문에, 수아레스는 18살의 생일을 맞이해서 데포르티보팀에 본격적으로 합류, 정식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데포르티보에서는 기대가 매우 컸습니다. 그런데.
FC바르셀로나가 루이스 수아레스의 모습에 반한 나머지, 이 어린 신동을 영입하고자 합니다. 결국 데포르티보의 꿈은 한 시즌도 안 되어서 끝났고, 루이스 수아레스는 1953년에 곧바로 FC바르셀로나로 전격 이적하게 되었습니다. 이적 초에는, 수아레스는 아직 나이도 어렸고 또한 바르샤에 좋은 멤버들이 많았던 탓에 벤치 신세를 지키기도 했습니다.
1958년 FC바르셀로나에는 아르헨티나 출신의 명장 엘레니오 에레라 감독이 부임하게 됩니다. 에레라 감독의 별명은 마술사 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그 마술의 주연으로 선택한 선수가 바로 수아레스 였습니다. 이 절묘한 구상은 그대로 들어맞았습니다. 1958-59시즌, 바르샤는 전설의 강팀으로 이름 높았던 레알 마드리드를 제치고 리그 우승을 일궈냅니다. 그리고 이듬해에도 우승하면서 리그 2연패! 바르샤의 핵심이었던 수아레스는 1960년에는 20대 중반의 나이로 유럽최우수선수상(발롱도르)까지 수상하게 됩니다. 에레라 감독과 수아레스, 정말 놀라운 마법의 콤비였습니다. 1960-61시즌 챔피언스리그는 바르샤 입장에서는 참으로 아쉬웠던 기억일 것입니다. 바르샤는 당시 챔스 5연패를 자랑하던 레알 마드리드까지 물리쳤습니다. 수아레스도 9시합 4득점으로 팀을 멋지게 지휘하면서 결승까지 올라갔습니다. 결승전에서 바르샤는 헝가리의 에이스 멤버들이었던 코치시, 치보르 등이 골을 넣었지만, 벤피카에게 아쉽게 2-3 으로 패배하고 말았지요. (이 때 놓친 챔스 우승 트로피는 30년이 더 지나서 요한크루이프 감독의 엘 드림팀이 1992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
에레라 감독은 1960년 이탈리아로 무대를 옮겨서 인테르밀란의 지휘를 맡게 됩니다. 사랑받는 제자 수아레스도 1961년에 인테르밀란으로 이적하게 됩니다. 파격적인 이적료를 지불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테르의 투자는 그런데 정말 정확했습니다. 이 두 사람의 마법은 세리에 A 에서도 멋지게 또 한 번 발휘되기 시작합니다. (한편 마법사를 잃어버린 FC바르셀로나는 이후 오랜 시간 우승과는 작별하고 맙니다. 60년 우승으로부터 오랜 시간이 흘러서 1974년이 되어서야 요한 크루이프의 전설적 활약 아래 우승하게 됩니다. 아아 에레라와 수아레스여. 왜 떠나갔니~~~)
이 두 사람이 인테르밀란으로 오고 난 후의 활약들은 정말 전설에 가깝습니다. 세리에 A 리그 우승 3회를 비롯해서, 1963-64시즌에는 결승전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3-1로 꺾고 사상 첫 챔피언스리그 우승까지 경험하게 됩니다. 게다가 이듬해까지 인테르밀란은 챔스리그를 2연패 하면서 빛나는 전성기를 보내게 됩니다. 이 두 번의 우승이, 지금까지도 인테르밀란의 챔스리그 우승트로피 전부입니다. 그 이후로도 아직까지도 챔스우승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100년 역사의 인테르밀란에서도 최절정의 시기에 활약했던 선수가 바로 스페인 출신의 수아레스 였고, 명장 에레라 감독이었습니다. 철의 캡틴 파케티를 비롯한 카테나치오의 철옹성 같은 수비, 수아레스가 지휘하는 훌륭한 공격. 공수가 완벽했던 이 때의 위대한 인터밀란을, 사람들은 지금도 그랜드 인테르 라고 부릅니다.
루이스 수아레스, 그는 도대체 어떤 선수였는지 플레이를 살펴보자면, 우선 에이스의 상징인 10번으로 이름을 날렸습니다. 훌륭한 테크닉을 바탕으로, 화려한 드리블, 탁월한 슛능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패스실력은 예술적인 수준이었습니다. 개인기가 뛰어났지만, 팀플레이에 굉장히 철저했던 선수였기 때문에, 그가 있었던 팀은 수 많은 우승트로피를 가져올 수 있었습니다. 플레이메이커로도 대단했기 때문에, 그는 현역시절 건축가라는 아름다운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습니다. 50년대와 60년대의 슈퍼스타. 루이스 수아레스, 그는 스페인이 배출한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입니다.
수아레스가 국가대표로서 출장했던, 모국 스페인에서 개최했던 유로 1964 이야기도 전설로 남아 있습니다. 이 당시 수아레스는 전성기였지요. 스페인은 유로64 당시 스타군단도 아니었지만, 특유의 조직력을 잘 살려서 선전해 나갑니다. 4강에서 연장 접전 끝에 헝가리를 물리쳤고, 결승에서 지난 대회 우승팀이었던 소련을 만났습니다. 홈 팬들의 열광적인 성원에 힘입은 스페인 국가대표팀은 놀랍게도 소련에게 2-1 로 승리를 거두면서, 유로 우승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현재까지도 스페인의 유일한 메이저 트로피입니다. 한편 수아레스는 유로우승, 챔스우승을 동시에 이끌면서도 1964년에는 아이러니하게도 발롱도르를 수상하지 못했습니다. 이 때 수아레스는 속상해서(?) 그랬던 것인지, 그럼 곡예라도 하란 말이냐고 우회적으로 재치있는 항의의 발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
은퇴 후에는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서, 한 때 스페인 국가대표팀을 맡기도 했었습니다. 90년 월드컵에서는 스페인 국가대표팀 감독으로서 우리 한국대표팀을 3-1 로 물리치는 등 스페인의 16강 진출을 이끌기도 했습니다. 지도자로서는 큰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습니다. 루이스 수아레스는 실력에 비해서 그 이름이 잘 알려지지 못했던 레전드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스페인 대표팀이 유로 2008에서 대단한 실력을 자랑하면서, 과연 우승후보다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44년만에 드디어 다시 한 번 우승을 차지하면서 강호에 걸맞는 위용을 자랑할 수 있을 것인가? 정말 흥미롭네요.
http://online.1004blog.com/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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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의 골리, 루이스 수아레스 야신을 제압하다
야신이 버티고 있는 철옹성 소련을 상대로 결승골을 넣은 사나이. 방패가 있다면 창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강하게 인식시킨 이가 바로 스페인의 무결점 공격수 루이스 수아레스였다.
수아레스의 스페인은 제2회 유럽선수권대회에서 무적 소련과 격돌했다. 당대 최고의 거미손 야신과 수아레스의 만남은 축구팬들의 관심을 불러모으기에 충분했다. 승부는 기막힌 도움으로 스페인의 선취골을 이끈 수아레스의 판정승으로 끝났다.
대표팀 선수 중 유일하게 해외파였던 수아레스는 이탈리아 인터 밀란에서 활약했고, 팀의 리그 우승도 이끌었다. 당시 프랑코 독재정권 아래서 신음하던 스페인 국민들은 조국 스페인의 우승, 그리고 수아레스가 이탈리아에서 전해오는 성공 소식이야 말로 삶의 한 줄기 빛과 같았다. 수아레스는 이탈리아리그 MVP는 물론 유로 64에서 발롱도르 2위를 차지하는 영광을 누렸다